라스트 오브 어스와 브릿지의 사랑을 대하는 차이
공리주의, 개인 존엄,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대하여
찰나의 비극, 영겁의 여정 : 같은 질문을 마주하다
2003년에 만들어진 체코 영화 〈Most〉는 30분정도의 런닝타임을 갖는 단편 영화입니다.
영어 제목인 〈The Bridge〉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체코어로 ‘Most’가 다리를 뜻하며, 영문 제목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죠. 이 영화는 다리와 관련된 도시전설처럼 구전되는 이야기를 영화화 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철도 도개교 관리소로 향했습니다. 아버지가 엔진실 안에 있는 사이, 아들은 다리 기어 장치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기차가 오게 되죠. 예정보다 일찍. 아버지는 선택해야 합니다. 다리를 내리면 기차에 탄 수십 명이 살게 되지만 아들을 잃게 됩니다.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아들이 살고 기차와 승객은 죽게 되죠.
아버지는 선택합니다 다리를 내리기로
그리고 영화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기차는 그런 아버지를 지나가고 승객들은 창밖을 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딱 한 사람,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만이 바라봅니다. 그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슬픔의 고통에 무너진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게임 개발사 너티독에서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게임이 출시됩니다. 플레이타임은 짧게 잡아도 열시간, 길면 스무 시간이 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그 시간 동안 조엘이라는 남자와 함께 걷게 됩니다. 폐허가 된 도시를 지나고, 죽은 자들의 잔해를 넘고, 살아 있는 자들의 잔인함을 견디면서. 그리고 마지막에, 조엘은 선택하게 됩니다.
그 선택의 구조는 〈Most〉의 아버지의 선택과 유사합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을 포기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생존 가능성을 지운다.
모스트 브릿지의 짧은 단편과 20시간 가까이 플레이하게 되는 라스트 오브 어스 Part1은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을 배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배신은 잘못인가.”
1장 — 철학자들의 오래된 싸움
공리주의와 개인 존엄, 그 해결되지 않는 대립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의 무게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도덕의 기준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했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것이 공리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감정이 아니라 계산이며. 직관이 아니라 산술이다. 한 명의 고통과 다섯 명의 고통을 저울에 올렸을 때, 다섯 명 쪽이 무겁다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
이 논리는 깔끔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깔끔함이 문제가 되죠
벤담의 제자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승의 이론을 다듬으면서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쾌락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 수정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의 핵심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결과가 행위를 정당화하고 더 많은 행복을 만들어내는 선택이 옳은 선택이다 라는 개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 논리를 〈Most〉의 아버지에게 적용하면, 그의 선택은 옳은 것이죠. 한 명의 아이보다 수십 명의 승객이 숫자적으로 더 크며 다리를 내린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입니다. 적어도 공리주의에서는요.
그런데 그 아버지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그 계산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게 됩니다.
2. 칸트가 벤담에게 던진 반론
임마누엘 칸트는 공리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도덕을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도덕의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원칙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준칙이었죠. 칸트에게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행위가 낳는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끄는 원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그 행위를 이끈 원칙이 보편화될 수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을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이 원칙을 〈Most〉의 아버지에게 적용하면, 그의 선택은 옳지 않습니다. 아들을 수십 명의 승객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칸트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멈춥니다.
아버지는 정말 아들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인가. 아버지가 선택한 행위는 다리를 내리는 것, 즉 승객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죠. 그것은 선한 행위에 수반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부작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철학에는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중 결과의 원리(Principle of Double Effect)라고 부르는 것인데, 원래는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출발한 논리입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선한 목적을 위한 행위가 의도치 않은 나쁜 결과를 낳을 때, 그 나쁜 결과가 행위의 수단이 아니라 부작용으로 발생한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원리로 아버지를 다시 보면, 그는 아들을 죽이기 위해 다리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승객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내렸고, 아들의 죽음은 그 행위가 낳은 비극적 결과였습니다. 의도된 수단과 의도치 않은 부작용 사이의 차이. 그 경계선이 아버지를 완전한 도덕적 범죄자로 만들지 않을 여지를 줍니다.
그러나 이 원리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다리를 내릴 때, 그는 아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선택했죠. 예견된 결과를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오늘도 논쟁 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버지가 다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그는 수십 명의 승객을 죽음으로 방치한 것이 됩니다. 그들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칸트의 원칙은 두 방향 모두에서 위반되고 맙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누군가는 수단이 되고, 어느 쪽을 선택해도 누군가의 존엄은 침해됩니다.
이것이 트롤리 문제가 20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철학자들은 이 딜레마를 수천 가지 변형으로 반복해왔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3. 그런데 라스트 오브 어스는 이 질문을 다르게 묻는다.
트롤리 문제의 고전적 형태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감정이 배제 되어 있죠.
철학적 사고 실험에서 선로 위의 다섯 명은 숫자입니다. 레버를 당기는 사람은 추상적 행위자이고 우리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없죠. 그래서 우리는 냉정하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Most〉는 그 결함을 채웁니다. 아버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얼굴을, 웃음을. 그래서 계산이란 개념이 사라집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거기 있기 때문이죠
〈라스트 오브 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20시간의 경험을 줍니다. 그 경험 동안 조엘과 엘리를 함께 걷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그들의 두려움을 보고,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의지하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택의 순간을 줍니다.
그 순간 플레이어는 더 이상 철학적 행위자가 아니게 되고 플레이어는 조엘이 되고 그리고 조엘, 즉 나에겐 엘리는 숫자가 아니게 되죠.
게임은 트롤리 문제를 철학 교실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심장 한복판에 박힙니다.
2장 — 조엘과 엘리, 혹은 사랑이 윤리를 삼킬 때
플레이타임이 만들어낸 감정의 무게
1. 게임이 속 조엘은 이미 부서져 있었습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프롤로그가 시작되고 게임은 플레이어를 감정적으로 꺽어놓습니다.
프롤로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균류 감염이 퍼지기 시작한 날 밤. 조엘은 딸 사라와 함께 도망칩니다. 비명소리가 가득한 도시를 빠져나가며, 조엘은 사라를 안고 달립니다. 그리고 군인의 총구 앞에서, 사라는 군인의 총에 죽게 됩니다. 조엘의 품 안에서.
어쩌면 짧을 수도 있는 이 프롤로그는 이후 엔딩까지의 플레이타임의 무게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죠. 조엘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그리고 왜 더 이상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게임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조엘을 닫힌 사람으로 그립니다. 조엘은 효율적이고, 냉정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사람. 사랑은 너무 비싼 감정이라는 것을 이미 배운 사람으로 그리죠.
그런 조엘에게 엘리가 오게 됩니다.
2. 엘리는 사라가 아니다, 그러나
처음에 조엘에게 엘리는 임무가 됩니다. 운반해야 할 화물. 감정을 쏟을 대상이 아니라 완수해야 할 계약이죠. 조엘은 그렇게 선을 긋고, 그 선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게임은 그 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워갑니다.
기린 떼를 함께 바라보는 장면에서 엘리가 웃음을 보이는 순간. 조엘이 엘리에게 기타를 가르치던 밤. 이 장면들은 서사적으로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전진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다면 마지막 선택은 의미를 잃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엘이 엘리에게서 사라를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엘리는 사라가 아닙니다. 성격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살아온 세계도 다릅니다. 게임은 그 차이를 지우지 않습니다. 조엘도 그 차이를 알고 있죠.
그런데도 무언가가 열립니다.
그것은 대체가 아니라 회복에 가깝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조엘에게 엘리는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과정이 아니라, 사라가 죽던 날 밤 함께 죽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살리는 과정입니다.즉 ‘아버지가 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구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였던 사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이 20년 만에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죠.
조엘에게 세상은 이미 그날 밤 끝났습니다. 사라가 죽던 순간, 조엘이 살아가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의 20년은 생존이었지 삶이 아니었죠. 그런 사람에게 인류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성벽을 쌓는 일. 지켜야 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을 구하라고 말하는 것. 조엘의 이기심은 그래서 단순한 이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람이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처절한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길면 길수록, 마지막 선택의 무게는 더 무거워집니다.
3.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는 무엇을 믿었는가
게임의 전제는 명확합니다.
엘리는 감염되었지만 발병하지 않는 유일한 면역 체계를 갇는 인간입니다. 그녀의 면역 체계를 분석하면 백신을 만들 수 고 백신이 만들어지면 인류가 생존하겠죠. 그러나 그 방법은 엘리의 뇌를 직접 다루는 수술이 필요하고, 그 수술은 엘리의 목숨 댓가로 합니다.
조엘과 엘리가 그 병원을 향해 걷는 20시간 동안, 플레이어는 이 여정이 옳다고 믿습니다. 엘리도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죠 한 명이 죽어 수백만 명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희생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고 조엘은 엘리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공리주의는 조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3장 조엘의 선택
그것은 잘못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1. 병원 장면을 다시 본다
조엘은 총을 듭니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그는 자신을 막으려는 파이어플라이 대원들을 사살하고 의사도 죽이고 마취된 엘리를 수술대에서 안아 올려 병원을 탈출하죠
저는 이 구간을 플레이하는 내내 손이 떨렸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었고 내 선택도 조엘과 다르지 않았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게임은 여기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설계입니다. 만약 이 순간 게임이 멈추고 “엘리를 구하겠습니까, 아니면 수술을 허락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이 게임의 평가는 전혀 달랐을 것입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게임이 되었겠죠. 그러나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를 조엘의 감정 안으로 밀어 넣고,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게 합니다.
엘리를 안고 병원을 빠져나왔을 때, 그리고 파이어플라이 수장이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계속 엘리를 쫓을 거란 이유로 자비를 배풀지 않았던 조엘이 되어 우리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그 안도감이 불편해지는 것은 조금 후의 일어납니다.
2. 조엘이 지운 것들
조엘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차갑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류가 감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백신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감염으로 수백만 명이 죽어갈 가능성이 열렸고 조엘은 그것을 알면서 선택했습니다.
공리주의의 언어로 말하면, 조엘은 역사상 가장 이기적인 선택 중 하나를 한 것이 되죠.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수백만 명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한 가지 이유는 게임이 파이어플라이를 온전한 영웅으로 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엘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습니다.엘리는 수술의 내용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파이어플라이는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 아래, 한 소녀의 동의를 생략했습니다. 그들의 공리주의는 엘리의 존엄을 처음부터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조엘의 선택을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엘리가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엘리가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래도 조엘은 같은 선택을 했을까에 대해 질문해봅니다.
3. 사랑은 윤리를 초월하는가?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낯선 사람 중 하나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내를 구하기 위해 공리주의적 계산을 거친다면 그것은 진짜 인간인가?
이 말은 당연해 보이지만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자녀 앞에서 우리는 계산하지 않죠. 계산해야 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윌리엄스는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상태를 죄악으로 만드는 윤리 체계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엘은 이처럼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엘리를 안고 이곳 탈출합니다.
이것은 잘못인가?
〈Most〉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는 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아들을 포기하고 수십 명을 살렸습니다. 공리주의의 언어로는 옳은 선택입니다.그러나 그 아버지의 삶은 그 선택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영화는 그 사건 이후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텅 빈 눈으로 걷는 남자 무언가가 영구적으로 꺼져버린 재만 남은 남자를 말이죠.
두 아버지가 있습니다.한 명은 아이를 포기하고 세상을 살렸고 한 아버지는세상을 포기하고 아이를 살려습니다.어느 쪽이 옳은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잠시 멈추게 됩니다.
4. 조엘이 거짓말을 했을 때
병원을 탈출한 후, 엘리는 조엘에게 묻습니다.무슨 일이 있었냐고. 파이어플라이는 어떻게 됐냐고.
조엘은 거짓말을 합니다.
백신 연구는 실패했다고. 파이어플라이는 해산했다고. 엘리 같은 면역자는 더 있었다고. 그러니 엘리가 없어도 세상은 괜찮다고.
이 거짓말이 조엘의 선택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입니다.
엘리를 구한 것은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거짓말은 다른 의미입니다. 엘리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빼앗은 것이죠. 파이어플라이가 엘리의 동의를 생략한 것과 구조적으로 같을 수도 있습니다.조엘은 엘리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엘리를 자신의 선택 안에 가두었기 때뭇이죠
사랑과 통제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조엘의 거짓말은 그 경계에 정확히 서 있습니다.
엘리는 게임이 끝날 무렵 조엘에게 묻습니다. 맹세해달라고. 파이어플라이에 대해 조엘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냐고.
조엘은 말하죠.맹세한다고
엘리는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말합니다.
알겠다고
그 알겠다는 말이, 믿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를 게임은 끝내 알려주지 않고 엘리의 미심적인 표정을 끝으로 게임은 끝이납니다.
4장 — 우리는 왜 안도했는가
플레이어라는 공범, 그리고 감정의 윤리
1. 패드를 내려놓은 후에 찾아오는 것
엘리를 안고 병원을 빠져나왔을 때, 우리는 엘리를 구했다는 안도감을 느낄 것입니다.
위기는 지나왔고 엘리가 살았습니다. 조엘이 해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 플레이어를 대변하는 조엘과 그리고 함께 한 엘리를 구했다는 감정이 쏟아 쏟아집니다.
2.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한 일
소설에서 조엘의 선택을 읽는 독자와, 게임에서 조엘의 선택을 직접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합니다. 독자는 조엘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플레이어가 되어 조엘이 된다. 총을 드는 것도 납니다. 폐허를 걷는 것도 납니다. 엘리를 안아 올리는 것도 바로 나죠.
게임을 연구자하는 고든 캘러한은 이것을 절차적 수사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행위를 시킴으로써 논증합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직접 그 이야기의 논리를 몸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죠. 조엘의 선택이 왜 불가피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그 불가피함을 손으로 느끼게 한합니다.
그것이 이 게임의 윤리적 실험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이유인 것이죠
우리는 조엘의 선택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주체죠
3. 〈Most-브릿지〉의 아버지와 조엘 사이
여기서 다시 〈Most-브릿지〉로 돌아와 이야기하면
〈Most-브릿지〉를 보는 관객은 아버지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그의 고통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그 선택을 직접 실행하지 않죠.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관객에게 판단의 여지를 줍니다.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감정적으로 압도되면서도 어느 정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스트 오브 어스〉는 적어도 저에겐 그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플레이하면서 조엘과 같은 자리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손으로 선택합니다. 판단하기 전에 이미 행동해 버린 것이죠. 그리고 행동한 후에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죠.
이것이 두 작품이 같은 질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Most-브릿지〉가 끝나고 생각해봅니다.
저 아버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스트 오브 어스〉가 끝나고도 생각했습니다.
나의 선택은 옳았는가.
전자는 타인의 딜레마입니다. 후자는 자신의 딜레마죠. 그리고 자신의 딜레마는 언제나 더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4. 감정은 윤리적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이 단순한 반응이 아닌 인지적 판단을 포함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분노할 때, 그 분노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판단을 담고 있고 우리가 무언가에 슬퍼할 때, 그 슬픔은 그것이 소중했다는 인식을 담고 있죠. 감정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엘리의 생존에 안도했을 때, 그 안도는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리주의적 계산보다 구체적인 한 사람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숫자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가능성보다 현실을 추구하며 추상적인 수백만보다 눈앞의 한 명을 더 소중한 것이죠.
이것이 잘못된 가치관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누스바움이라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도덕적 상상력의 핵심이라고. 타인을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없는 윤리는 계산기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감정이 수백만 명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딜레마가 찾아 옵니다.
우리의 안도감은 옳으면서 동시에 불충분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옳은 윤리의 자리가 있을 겁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자리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그 앞에 세워두죠.
5장 — 사랑과 윤리는 화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1.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일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을 배신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배신은 잘못인가.
공리주의는 조엘의 선택을 잘못이라고 말하겠죠. 칸트의 윤리학은 파이어플라이의 선택을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계산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하겠죠. 마사 누스바움은 감정이 윤리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감정적인 결정은 인간적으로 옳지만 동시에 옳지 않다.
이 질문이 2000년이 넘도록 철학자들을 괴롭혀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라스트 오브 어스〉와 〈Most〉가 이 질문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죠.
답이 없다는 것이 허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답이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이 질문을 진솔하게 대하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2. 〈Most〉의 아버지가 틀리지 않았고, 조엘도 틀리지 않았다
두 아버지를 다시 나란히 놓아본다면
〈Most-브릿지〉의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합니다. 이것은 공리주의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그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옳은 선택을 했고, 그 옳은 선택으로 인해 평생을 부서진 채로 살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선택이 한 인간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공리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엘은 엘리를 살렸습니다. 그것은 공리주의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죠. 그러나 그 선택이 그를 악인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는 사랑했기 때문에 엘리를 선택합니다.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선택이 진실한 인간의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죠.
두 선택 모두 완전하지 않습니다. 두 선택 모두 무언가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딜레마의 본질이 되죠. 이 딜레마는 나쁜 선택과 좋은 선택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옳고 각자의 방식으로 부족한 두 선택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런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3. 엘리가 알고 있었다면
병원을 빠져나온 후, 조엘은 거짓말을 합니다.
백신 연구는 실패했다고. 파이어플라이는 해산했다고. 엘리 같은 면역자는 더 있었다고. 그러니 엘리가 없어도 세상은 괜찮다고.
이 거짓말을 단순히 자신의 선택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읽으면, 조엘은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 거짓말은 전혀 다른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조엘은 엘리가 그 진실을 알았을 때 무엇을 느낄지 알고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자신 때문에 백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의 죽음과 등가라는 것을. 그 무게를 열네 살짜리 아이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조엘의 거짓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가 평범한 아이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무게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마지막 방어기제였습니다. 세상을 구할 뻔했던 아이가 아니라, 그냥 살아 있어도 되는 아이로. 희생의 아이콘이 아니라, 웃고 화내고 기타를 배우고 기린을 보며 놀라는 아이로 살게 하려는 것이죠.
그것은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또 하나의 폭력이었습니다.
파이어플라이가 엘리의 동의를 생략한 것처럼, 조엘도 엘리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지키려는 마음과 통제하는 행위는 때로 같은 손에서 나옵니다. 조엘은 엘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거짓을 말했고, 그 사랑이 엘리의 진실을 알 권리보다 앞섰습니다.
사랑과 통제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조엘의 거짓말은 그 경계에 정확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날 무렵, 엘리는 조엘에게 묻습니다. 맹세해달라고. 파이어플라이에 대해 조엘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냐고.
조엘은 말하죠. 맹세한다고.
엘리는 잠시 침묵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알겠다고.
이 알겠다는 말이, 믿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를 게임은 끝내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말로, 이 게임이 남기는 가장 긴 여운입니다.
4.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철학은 우리에게 원칙을 줍니다. 공리주의는 마치 결과를 계산하라고 말하는 것 같고. 칸트는 원칙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원 복도에서, 혹은 도개교 엔진실 앞에서, 우리는 철학책을 펼칠 시간이 없죠.
우리는 선택해야합니다. 두려움으로, 사랑으로, 본능을 근거로 선택해야합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그 선택 이후에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Most-브릿지〉의 아버지처럼 텅 빈 눈으로 새로운 도시를 걸으며. 조엘처럼 거짓말의 무게를 안고 엘리 곁에 머물며 살아갑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 안으로 스며들어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택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는지를,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는 것. 공리주의적 계산을 완전히 따르지 못하더라도, 내가 포기한 것들의 무게를 잊지 않는 것. 사랑이 윤리를 삼켰더라도, 삼켜진 윤리를 기억하는 것이죠.
조엘은 엘리를 살렸고 그 선택의 무게를 알죠.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조엘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면서 살아갑니다.
모르는 척하는 것과, 알면서 감당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죠.
5. 게임이 끝난 후에도 남는 것
“윤리는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
게임의 엔디에서 엘리의 알겠다는 말 이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게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엔딩은 어쩌면 게임의 이야기를 가장 잘 마무리한 장치일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엘과 엘리는 함께 하기 때문이죠.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거짓은 남아 있죠. 포기된 수백만의 가능성도 남아 있고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삽니다. 해결되지 않은 것들을 안고, 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죠. 현실에 우리와 같습니다.
〈Most〉의 아버지도 살아갑니다. 아들을 잃은 후에도, 새로운 도시에서도, 그는 걸어 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를 잃은 그날 그 기차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던 여자의 품에 안긴 아이을 보게 됩니다. 세상은 이런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선택 이후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상실 이후에도. 죄책감 이후에도 계속 됩니다.
그것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메세지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선택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게임과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그것이 남긴 질문은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숨을 쉽니다. 답이 없는 질문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윤리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세상은 무너졌을지라도, 당신 곁의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희망은 충분하니까요.“
“세상을 구하는 것은 정의지만, 나를 살리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긴 영상을 이렇게 마지막까지 시청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영상 제작에 힘이 될 수 있도록 좋아요를 조심스럽게 부탁드려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상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