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기꺼이 복종하는가 – 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가 예언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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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멋진 신세계’ 또는 드라마 ‘멋진 신세계’를 보고 오심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유튜브 채널 ‘기묘한 무비’ 채널에서 소개한 ‘멋진 신세계’ 영상을 보시면 빠르게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서론 — 1932년의 예언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한 편을 출판했습니다.
헉슬리의 소설은 유토피아처럼 세계관을 묘사합니다. 전쟁도 굶주림도 질병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원하는 것을 언제든 얻을 수 있고, 불행해질 때마다 소마라는 약을 삼키면 즉시 행복해집니다. 폭력으로 통제하는 독재자는 없습니다. 비밀경찰라는 개념도 고문실이 없다.
이처럼 언뜻 이 세계는 유토피아처럼 들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헉슬리는 이것을 디스토피아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이 소설을 단순한 미래 소설이 아닌, 인간의 조건에 대한질문들로 채워냈습니다.
왜 완벽한 행복이 디스토피아인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헉슬리의 세계가 낯선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현재와 닮은 점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조지 오웰은 1948년에 『1984』를 썼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빅브라더였죠. 책을 금지하는 자들, 진실을 통제하는 자들, 빅브라더의 눈이 우리를 감시하는 세계. 오웰의 세계에서 인간은 외부의 힘에 의해 짓눌립니다.
하지만 헉슬리가 두려워한 것은 달랐습니다. 억압이 필요 없는 세계를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통제를 원하는 세계. 진실을 금지할 필요가 없는 세계, 왜냐하면 아무도 진실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책을 태울 필요가 없는 세계, 왜냐하면 아무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죠 고통을 주지 않아도 되는 세계, 왜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쾌락 속에 복종하기 때문에 이런 억압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웰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웰의 두려움을 통한 독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현실이 되었죠. 그러나 헉슬리의 두려움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 조용하고 더 완벽한 방식으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기꺼이 복종하는가. 우리는 왜 소마를 원하는가. 그리고 자유를 원했던 사람의 결말은 왜 항상 비극인가.
1932년의 질문이 현재의 우리에게 도착햇을대 이제 우리가 답을 찾아봐야할 차례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입니다.
1장 — 소마가 제거한 것
행복의 강제,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1-1. 약 한 알이면 충분한 세계
헉슬리의 세계에는 소마라는 약이 있습니다.
부작용도 없고 중독되지도 않습니다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먹으면 즉시 행복해집니다. 슬픔과 불안이 사라지고, 지루함이 사라지죠. 그리고 약효가 사라지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때쯤이면 다시 소마를 먹으면 끝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받지 않죠. 그런데 왜 이 세계가 디스토피아인가.
답은 소마가 제거한 것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마는 슬픔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슬픔이 없기에 기쁨의 무게도 사라지죠. 우리가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것은 슬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빛이 의미를 갖는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고 소마가 어둠을 지운 세계에서 빛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빛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냥 밝음이죠 그 외엔 의미가 없습니다.
소마는 불안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불안이 없으면 욕망도 사라지고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것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것을 향한 열망은 열망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소비가 되죠. 헉슬리의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습니다.
소마는 고통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고통이 없으면 성장도 없죠. 인간이 무언가를 배우고, 깊어지고, 변화하는 것은 대부분 고통을 통해 얻습니다. 실패, 상실, 선택의 고통. 소마는 모든 고통을 지웁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지우게 되죠. 헉슬리가 두려워한 것은 고통이 아닌 고통의 소멸이었습니다.
1-2. 행복은 목적인가, 부산물인가
현대 사회는 행복을 목적으로 다룹니다. 자기계발서는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광고는 특정 제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약속합니다. 세계는 국민총행복지수를 측정해서 순위를 정하죠.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 목표로, 도달해야 할 상태로 이해합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진고 행복은 의미 있는 삶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이지 목표로 삼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소마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마는 행복을 직접 주입합니다. 그냥 한 알로 가능합니다. 그렇게 얻어진 행복은 행복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행복의 내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행복의 시뮬라크르일지 모릅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진짜가 아닌 시뮬라크말이죠.
1-3. 고통을 선택할 권리
소설의 후반부에서, 세계국가의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와 뉴 런던의 소속이 아닌 야만인 존 사이에 결정적인 대화가 있습니다. 존은 소마 없는 삶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원한다고. 불행을 원한다고 말이죠 몬드는 그에게 묻습니다. 왜 고통을 원하는가. 존은 답합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진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한다. 나는 죄를 원한다.라고 말합니다.
몬드는 그것들은 모두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존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이 대화는 멋진 신세계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화입니다. 헉슬리는 여기서 가장 급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그 권리를 빼앗는 것이, 설령 선의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폭력이 되는 것은 아닌가?
현대 사회는 점점 더 고통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죠. 질병의 고통을 줄이고, 빈곤의 고통을 줄이고, 차별의 고통을 줄이는 것. 이것은 문명이 발전함에 오는 성과입니다.
그러나 헉슬리는 묻습니다. 그 방향이 끝까지 가면 어디에 도달하는가? 모든 고통이 제거된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2장 — 감시 없는 통제
스스로 복종하는 인간의 탄생
2-1. 빅브라더는 필요 없다
1949년,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를 만들었습니다.
텔레스크린이 모든 방에 있고 사상경찰이 존재합니다. 빅브라더가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는 매일 다시 쓰입니다. 오웰의 세계에서 통제는 가시적이죠.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통재에서 벗어나면 목숨을 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종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헉슬리의 세계에는 빅브라더가 없습니다.
감시 카메라도 없고, 사상경찰도 없고, 고문실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복종합니다. 이탈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도 않습니다. 시스템에 저항하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미디어 이론가 닐 포스트먼은 1985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에 의해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파괴될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말이죠. 오웰의 두려움은 외부의 억압이었다면 헉슬리의 두려움은 내부의 욕망입니다. 억압 없는 통제. 강제 없는 복종. 이것이 헉슬리가 발명한 가장 정교한 공포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오웰의 세계보다 더 완벽한 이유는, 저항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빅브라더에게는 저항할 수 있으나 자신의 욕망에개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요?
2-2. 통제라는 기술
헉슬리의 세계국가가 통제를 완성하는 방식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계급화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계급이 정해집니다. 수면 중 반복되는 메시지, 보카노프스키 과정을 통한 신체 조건화, 감정적 반응의 설계. 상위 계급인 알파 계급의 아이들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도록 조건화되며. 최하위 계급인 엡실론 계급 아이들은 자신의 단순한 삶에 만족하도록 조건화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의도적인 계급화에 결정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의식 이전에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계급화 방식은 우리에게도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가정입니다. 금수저, 흙수저라 나뉘는 부모의 건강상태, 유전질환 그리고 경제적 여건에 의해 태아는 태어나기도 전에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받고 스트레스에 비교적 적게 노출되며 자라나죠. 그리고 태어남과 동시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같은 출발선이 아닌 이미 오래전 유전자에 기억된 알파계급의 의식이 운명처럼 장착되어 있고 반대의 경우 결핍과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 현실의 소마를 찾아 해매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 행복이라고 믿는 것. 이것들을 가르치는 방식이 현재의 알파계급과 앱실론 계급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교육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환경은 공평한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풍족해 원하는 것이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광고라는 자본주의 수단에 넘어가 원하는 것을 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갖는 꿈의 깊이는 누가 가르칠까요? 어떤 이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거짓으로 포장된 삶을 꿈꾸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성인이 될때까지 가시적이지 않는 계급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다음은 소비입니다.
헉슬리의 세계에서 소비는 도덕입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이 미덕이죠.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소비하는 동안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소비하는 동안 불만을 느낄 여유가 없죠. 소비 자체가 삶이 됩니다.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헉슬리의 묘사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됩니다. 우리는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도록 설계된 욕망을 따라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신제품 출시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유행은 점점 빠르게 바뀌고, 우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고 있죠.
세 번째는 쾌락입니다.
헉슬리의 세계에서 섹스는 자유롭고 오락이며 소마는 항상 이용할 수 있죠.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불만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생겨나는데 모든 욕구가 즉각 충족되는 세계에서 불만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만이 없으면 저항도 없겠죠.
계급화, 소비, 쾌락.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감시는 불필요해집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시스템 안에 머물고 머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더 정확히는, 시스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스템 안에서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2-3. 푸코가 틀린 세계
미셸 푸코는 근대 권력의 작동 방식을 판옵티콘으로 설명했습니다.
원형 감옥.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죄수들은 자신이 언제 감시받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시받는다고 느끼며 스스로 행동을 통제합니다. 권력은 실제로 감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시받는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하죠. 푸코는 이것이 학교, 병원, 공장, 군대 등 근대적 제도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헉슬리의 세계에서 푸코의 판옵티콘은 필요 없습니다.
판옵티콘은 감시받는다는 느낌을 통해 복종을 만들고 그것은 여전히 외부의 시선을 전제합니다. 즉
감시탑이 있어야 한다.
설령 그 안에 아무도 없더라도
감시탑이라는 구조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헉슬리의 세계에는 감시탑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은 감시받는다는 느낌 없이 복종을 합니다. 감시탑을 내면화한 것이 아니라, 복종 자체를 욕망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푸코의 판옵티콘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통제방식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통제라는 단어조차도 아닐 수 있는 것이 통제는 누군가가 통제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헉슬리의 세계에서는 통제하는 자도 필요 없죠. 시스템이 스스로 작동합니다. 사람들이 시스템을 원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통제인가, 아니면 자유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헉슬리의 세계국가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는 안정의 적이다. 우리는 자유 대신 행복을 선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선택에 만족한다.
문제는 그 선택이 정말 선택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4. 알고리즘은 소마보다 정교하다
헉슬리가 소마를 상상한 것은 1932년이었습니다.
그는 복용하는 약으로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소마가 있습니다. 알고리즘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감시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죠. 알고리즘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그냥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죠. 우리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추천하고, 우리가 공감할 만한 게시물을 피드 상단에 올리고, 우리가 머무르고 싶어할 콘텐츠를 끊임없이 공급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인가?
알고리즘은 우리의 과거 행동을 학습해서 다음 욕망을 예측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클릭하면, 알고리즘은 그것을 우리가 원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비슷한 것을 더 많이 공급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은 점점 더 알고리즘이 예측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리즘을 따라가는 것인지, 알고리즘이 우리를 따라오는 것인지 경계가 흐려지죠.
알고리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만듭니다. 돈이 필요해? 플랫폼은 스마트폰의 마이크를 통해 얻은 개인의 욕망으로 부업과 투자 광고를 띄웁니다. 그리고 돈 버는 방법과 같은 유형의 영상을 내 앞에 갖다 놓죠
돈이 필요 없어? 소셜미디어를 통해 풍요로운 삶은 사는 인플루언서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치 이처럼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돈이 필요해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 우리의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 매일 작동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통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편리함, 정보라고 부릅니다. 맞춤 서비스라고도 부릅니다. 혹은 그냥 일상이라고 부릅니다.
헉슬리가 두려워한 세계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2-5.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욕망을 설계한다는 것. 소비가 우리의 사고를 채운다는 것. 쾌락이 우리의 저항을 잠재운다는 것.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면서도 계속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다시 스마트폰을 들게 됩니다.
이것이 헉슬리의 통제가 오웰의 통제보다 더 완벽한 이유일지 모릅니다.
오웰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억압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항하고 싶어하죠. 저항이 가능합니다. 빅브라더를 증오할 수 있죠. 그러나 헉슬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통제받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는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저항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저항은 정말 불가능한가.
이 질문은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통제는 쇠사슬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쾌락으로 만들어지고 때로는 편리함으로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통제가 가장 완벽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제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3장 — 설계된 인간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삶
3-1. 수정란의 운명
헉슬리의 세계에서 인간은 유리병에서 태어납니다.
자궁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습니다. 아버지도 없죠. 수정란은 부화 센터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분류됩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다섯 개의 계급. 그리고 그 분류는 태어나기 훨씬 전에, 세포 단계에서 이미 완성됩니다.
알파 계급의 배아는 최적의 환경에서 자랍니다 충분한 산소, 충분한 영양, 충분한 자극. 엡실론 계급의 배아는 의도적으로 산소를 제한당합니다. 뇌의 발달을 억제하기 위해. 단순한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지능이 허용됩니다. 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층 노동자로 설계된 것이죠.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엡실론은 자신이 엡실론이라는 것에 만족합니다. 알파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파의 삶을 원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건화는 완벽하다. 각자는 자신의 자리를 사랑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현재 우리 세계는 다르다고 믿고 있나요? 우리는 능력에 따라 기회를 얻는다고. 노력하면 계층을 이동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잠깐 멈춰야 한다.
3-2. 우리의 배아는 어디서 분류되는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아비투스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 새겨진 성향, 취향, 사고방식의 총체입니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어떤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삶을 당연하다고 여기는지. 이것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우리 안에 새겨넣은 것입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아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같은 교실에 앉아도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것을 보게 되죠. 같은 기회를 제공받아도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비투스는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헉슬리의 세계에서 계급은 배아 단계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세계에서 계급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부모의 학력은 무엇인가. 부모의 경제적 수준은 어떠한가. 이것들이 한 인간의 가능성의 범위를 태어나는 순간 대략적으로 결정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죠. 바로 계층을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구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헉슬리의 세계에서도 예외적인 개인들이 있습니다. 버나드 마르크스처럼, 헬름홀츠 왓슨처럼. 그러나 그 예외들은 결국 시스템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헉슬리의 세계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아 분류는 공개적이고, 계획적이고, 공식적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그것을 능력주의라는 언어로 포장합니다. 노력하면 된다. 기회는 평등하다. 결과는 개인의 책임이다라고 말이죠. 이 포장이 헉슬리의 노골적인 계급 설계보다 더 잔인할 수 있습니다.
헉슬리의 엡실론은 자신이 엡실론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실패를 자신 탓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우리 세계의 하층 계급은 자신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태어났다는 것을 모른 채, 자신의 실패를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해석하도록 학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잔인한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이죠.
3-3. 만족은 행복인가
최하층 계급인 엡실론은 불행해 하지 않습니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족하는 세계죠. 그리고 그 만족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 멋진 신세계의 주제입니다.
만족과 행복은 같은 말인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빌려오면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이 있죠.
이 문장은 종종 엘리트주의적 발언으로 오해받습니다. 그러나 밀이 말하려 한 것은 다른 것이죠. 만족은 욕망의 충족이다. 행복은 그보다 더 복잡한 무언가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것,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엡실론의 욕망은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족하죠. 그러나 그 만족은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추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만족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질문에 밀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설계된 만족이 아닐까요?
우리 세계로 돌아오면, 비슷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발견한 행복인가, 아니면 광고가, 소셜미디어가, 문화가 우리에게 행복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가?
이 질문에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3-4. 버나드 마르크스 — 시스템 안의 이방인
헉슬리의 세계에도 완전히 조건화되지 않은 인물이 있습니다.
버나드 마르크스. 알파 계급이지만, 태아 제조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파답지 않게 작은 체구를 가졌고, 알파답지 않게 시스템에 불만을 느낍니다. 그는 소마 없이 현실을 느끼고 싶어하고 고독을 원한며 깊이를 원합니다.
그러나 버나드는 끝내 영웅이 되지 못하죠.
그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시스템이 주는 특권을 원합니다. 야만인 존과 함께 유명해지자, 그는 그 명성을 즐깁니다. 자신의 불만이 진정한 저항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더 좋은 위치를 원하는 욕망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헉슬리는 버나드를 통해 매우 불편한 진실을 보여줍니다.
시스템에 불만을 가진다는 것과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경우, 불만은 시스템 바깥을 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스템 안에서 더 나은 위치를 원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불평등한 시스템에 분노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승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시스템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다른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버나드는 우리와 닮았습니다. 현실을 비판하면서 현실의 보상을 원하는 것. 구조를 문제 삼으면서 구조 안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것. 저도 사실 알고리즘을 비판하면서 이 영상이 알고리즘으로 많은 조회수가 나오길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은 불만을 가진 자조차 흡수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3-5. 설계된 삶과 선택된 삶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설계된 삶을 살면서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것인가.
헉슬리의 세계는 이 질문에 극단적인 형태로 답합니다. 설계가 너무 완벽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더 교묘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천 개의 직업 중에서 고를 수 있고, 수백 개의 도시 중에서 살 곳을 정할 수 있고, 수만 개의 콘텐츠 중에서 볼 것을 선택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선택들의 범위가 이미 설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선택일까요?.
감옥의 수감자가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선택한다면 그것은 선택이 될 수 있죠. 그러나 그 선택이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헉슬리의 세계처럼 노골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조는 작동하죠. 보이지 않게, 조용하게, 우리가 선택이라고 부르는 행위들 안에서 말이죠.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절망의 시작인가, 아니면 진짜 선택의 시작인가로 물었을 때
등장인물 야만인 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어느정도 답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른 방식으로 자란 인간, 야만인 존이 문명과 충돌하는 이야기로.
4장 — 야만인 존
자유를 원한 자의 결말
4-1. 문명 바깥에서 자란 인간
존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조건화되지 않은 인간입니다.
그는 세계국가의 부화 센터가 아닌,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있었고. 고통을 알았고. 질병이 있었습니다. 죽음도 있었겠죠. 그리고 책이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전집. 그것이 존이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존은 셰익스피어를 통해 사랑을 배웠습니다. 비극을 배웠습니다. 죄와 구원을 배웠고. 인간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세계는 불완전했고, 잔인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그가 문명 세계로 들어옵니다.
처음에 그는 매혹되죠. 청결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계. 그러나 매혹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껍데기만 남은 세계였죠. 사람들은 웃지만 기쁘지 않았고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깊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비어있었습니다.
존은 그 공허함에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느낍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그를 파괴합니다.
4-2. 셰익스피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
존이 문명 세계에서 가장 먼저 충돌하는 것은 언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언어로 세계를 표현하려 합니다. 사랑을 말할 때, 고통을 말할 때, 아름다움을 말할 때. 그러나 문명 세계의 사람들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존의 언어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감정들이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은 소통의 문제로 생각하기엔 결이 다는 문제였죠 언어는 경험을 담는 그릇인데 어떤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담을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헉슬리의 세계 사람들에게 비극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는 것은, 그들이 비극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실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는 것은 그들이 상실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죠.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우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만 경험할 수 있다. 헉슬리의 세계 사람들은 고통의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고통을 통해 도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도 잃어버렸습니다.
존은 그 상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실로 인식하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도 알게 되죠.
이것이 그를 고립시킵니다.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말이죠.
4-3. 레니나와의 충돌 —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
존은 레니나를 사랑합니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죠. 셰익스피어가 가르쳐준 방식의 사랑. 깊고, 배타적이고, 고통스럽고, 전부를 거는 사랑으로 레니나를 사랑합니다.
레니나도 존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존이 원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녀에게 욕망은 즉각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며 기다림이 없고 갈망이 없고 불확실성이 없는 것. 그녀는 존을 원하지만, 존이 원하는 방식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충돌은 두사람의 문제가 충돌이 아닌 어쩌면 두 세계가 충돌일지도 모릅니다.
존에게 사랑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전부를 걸고, 잃을 수도 있고, 그 잃음이 비극이 되는 것. 레니나에게 사랑은 소마처럼 즐겁고 부작용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는 사랑. 집착이 없는 사랑. 그러나 존의 눈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죠.
그렇다면 누가 옳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것이 헉슬리의 정직함입니다. 레니나의 방식이 고통이 없다는 것은 사실며. 존의 방식이 더 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가 존을 파괴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죠.
사랑이 고통을 전제해야 한다면, 고통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혹은, 고통 없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다른 종류의 사랑인가. 헉슬리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두 종류의 삶을 충돌시키고, 그 충돌의 결과를 보여줄 뿐입니다.
4-4. 무스타파 몬드와의 대화 — 자유의 대가
소설 후반부, 존은 세계국가의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와 마주 앉게 됩니다.
둘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 대화는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대화입니다.몬드는 악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적이고, 솔직하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 과학자였고, 금지된 책을 읽었고, 다른 세계를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스템을 선택하게 되었죠.
존은 묻는다. 왜 예술을, 과학을, 종교를 허용하지 않는가?
몬드는 답합니다. 그것들은 불안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은 고통에서 나옵니다. 과학은 기존 질서를 의심하게 만들고. 종교는 현재보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 셋은 모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안정된 세계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몬드는 덧붙입니다.
행복과 진실은 양립하기 어렵다. 행복과 아름다움도 양립하기 어렵다. 우리는 행복 선택했다.
존은 이것에 저항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한다. 늙어갈 권리를, 병들 권리를, 굶주릴 권리를, 두려워할 권리를, 고통받을 권리를 원한다.
몬드는 조용히 말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네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것들 없이도 기능한다.
이 대화의 핵심은 두 사람 모두 옳다는 것입니다.
몬드는 자신의 세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사람들은 고통받지 않습니다. 전쟁이 없고 굶주림이 없고 그리고 이것은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고통과 전쟁과 기아로 가득했습니다. 그것들을 제거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고통 없이는 깊이도 없고. 상실 없이는 의미도 없습니다. 자유 없이는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공허해집니다.
헉슬리는 이 딜레마에 해결책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두 개의 세계를 충돌시키고,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4-5. 존의 결말 — 자유의 대가
존은 문명 세계를 탈출합니다.
그는 런던 외곽의 버려진 등대로 가고 혼자서 살기로 합니다. 농사를 짓고, 기도하고,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기로 합니다. 소마 없이. 조건화 없이. 설계 없이 살려고 하죠
그러나 세계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의 고독한 삶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기자들이 찾아오고,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카메라가 그를 담는다. 그는 구경거리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거부할수록 더 유명해집니다. 그의 저항 자체가 콘텐츠가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소마의 향기와 함께 레니나가 나타나고, 군중이 몰려오고, 존은 자신이 거부했던 세계의 논리 안으로 다시 끌려들어갑니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고 그는 자신이 혐오했던 것들을 행하게 됩니다.
다음 날 아침, 존은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결말은 잔인하죠. 그러나 헉슬리는 이 결말을 피하지 않습니다.
존의 비극은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유를 원하는 것은 옳았고. 고통을 선택하는 것도 옳았습니다. 깊이를 원하는 것도 옳았지만 옳음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죠. 그를 수용할 수 있는 세계가 없었던 것 입니다.
시스템은 존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은 존을 구경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존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잃었습니다.
나이트크롤러의 루이스 블룸과 비교해보면 이 비극의 윤곽이 더 선명해집니다. 루이스는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존은 시스템에 완벽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정반대지만, 그것을 결정한 것은 동일한 하나의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4-6. 우리는 모두 존인가, 레니나인가
우리는 자신이 레니나가 아니라 존이라고 믿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소마를 거부하고, 깊이를 원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존보다 레니나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불편함을 피합니다. 우리는 자극적인 것을 클릭하고 우리는 깊은 책보다 짧은 영상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질문보다 쉬운 답을 원한죠. 이것들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에너지를 아끼도록 설계되어 있죠.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축적될 때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존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레니나처럼 사는 것. 그 간극이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불만의 원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깊은 삶을 원하지만, 그것을 위해 필요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가 요구하는 고통을 원하지 않죠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존도 레니나도 아닌 무언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5장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1932년의 질문이 2026년에 도착했을 때
5-1. 헉슬리는 틀렸는가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출판한 것은 1932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9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 부화 센터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소마는 없습니다. 알파와 엡실론으로 공식적으로 분류되지도 않죠. 표면적으로 보면, 헉슬리의 상상은 빗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보입니다.
우리는 부화 센터에서 태어나지 않지만, 태어나는 순간 이미 많은 것이 결정됩니다. 소마는 없지만, 도파민을 즉각적으로 주입하는 장치가 손안에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계급이 분류되지 않지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는 조용하고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빅브라더는 없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학습하는 알고리즘이 있습니다.
헉슬리의 예언은 그가 상상한 형태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더 조용하고, 더 세련되고, 더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합니다. 저항할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5-2. 안다는 것의 대가
동굴 안에 갇혀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림자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봅니다. 진짜 세계를 보죠. 그리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말합니다. 당신들이 보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동굴 안의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인물로 여기죠.
알아챈다는 것은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굴 밖은 눈부시고, 새로운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혼자 알아챈 사람은 동굴 밖과 동굴 안 사이 어딘가에 서게 됩니다. 존처럼.
문제는 안다고 해서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소마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키게 됩니다. 알고리즘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크롤하게 되죠. 설계된 욕망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나 소비합니다. 그 간극 — 아는 것과 멈추지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 — 이 새로운 종류의 고통을 만듭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둘 다입니다. 그리고 그 둘 다라는 답이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죠.
그래서 자기혐오는 답이 되지 못합니다. 소마를 삼키는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혐오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또 다른 소마가 됩니다. 자기혐오라는 이름의 소마. 더 유용한 것은 질문입니다. 나는 왜 지금 이것을 하는가. 이것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도록 설계된 것인가. 매번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질문 자체가 이미 동굴 밖으로 한 걸음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3. 아직이라는 단어
존의 비극은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유를 원한 것도 옳았고, 고통을 선택한 것도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습니다.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이 없었고, 같은 질문을 가진 공동체가 없었습니다. 그는 시스템 전체와 혼자 싸웠고, 그 싸움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변화는 개인의 각성에서 시작하지만, 개인의 각성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헉슬리의 세계는 완성된 세계입니다. 조건화가 완성되어 있고,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존이라는 한 명이 있었지만, 파괴되었죠.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완성되어 가는 중이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직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아직이라는 것은, 아직 다른 방향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아직 질문할 수 있고, 아직 존처럼 고립되지 않아도 되며, 아직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존에게 없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가능합니다.
헉슬리는 이 소설을 디스토피아로 그렸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입니다. 상처 없는 삶은 매끄럽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담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의 맛은, 달콤한 소마가 아니라 쓰고 아픈 순간들이 섞여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았더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 균열 사이로 새로운 진실이 싹틀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멋진 신세계’는 시스템이 설계한 곳이 아닌, 여러분의 서툰 선택들이 모인 그곳에서 시작되길 응원합니다.”
“완벽한 행복이라는 가짜 낙원보다, 상처 입은 진실이라는 광야를 선택할 당신에게.”
긴 영상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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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감상학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