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릭 경제, 사이코패스적 주체성, 그리고 공범의 윤리
서론 — 괴물은 어디서 왔는가
2014년, 댄 길로이 감독의 영화 〈나이트크롤러〉가 개봉했을 때, 많은 관객은 루이스 블룸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소름 끼치는 악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타인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아 돈을 법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도 단 한 번도 가책 따윈 느끼지 않습니다.
관객은 그를 보며 불편해하고, 때로는 혐오감까지 갖게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루이스는 처벌이 아닌 오히려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 좋은 카메라를 갖추게 되고,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며 더 넓은 시장을 향해 나아가며 영화는 끝이나죠.
이 불편한 결말은 영화속 주인공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일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지금은 루이스 블룸 같은 이를 처벌하는가, 아니면 보상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두가지 이성이 다툴 것입니다.
범죄와 같은 일에 벌을 줘야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배우기도 했기 때문이죠.
영화에서 루이스가 카메라를 들고 새벽의 로스앤젤레스를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상을 사준 방송국이 있고 방송국이 그 영상을 편성한 것은, 시청자들이 봤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들이 봤다는 것은, 우리가 봤다는 것이며. 루이스 블룸은 어쩌면 우리에게서 탄생한 괴물. 즉 그는 현대의 사회적 생태계가 요청하고, 선택하고, 키워낸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상은 루이스 블룸이 속한 생태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재의 미디어 시스템, 특히 디지털 전환 이후 알고리즘과 클릭 경제가 어떻게 공포와 폭력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만들어왔는지를 살펴보고.
또한 루이스 블룸이라는 인물을 단순한 병리적 사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요청하는 인간형의 극단적 형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인 시스템 안에서 관찰하고, 소비하고, 침묵하는 행위가 어떻게 공범의 구조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괴물은 어디서 왔는가.
그 질문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하겠습니다.
세계는 원래 이렇게 생겼다
스펙터클의 경제학, 신자유주의적 주체, 그리고 공범의 윤리
1. 공포는 어떻게 상품이 되었는가
1967년, 프랑스의 사상가 기 드보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근대적 생산 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삶 전체는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한 스펙터클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을 직접 경험하는 대신, 이미지로 된 삶을 소비하게 되는 상태 전체를 말하죠.
우리는 더 이상 사건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뉴스로, 영상으로, 피드로 사건의 이미지를 소비하죠.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어느 순간 현실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드보르가 이 문장을 쓴 것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알고리즘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드보르의 진단은 지금 이 순간에 더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이트크롤러〉의 방송국 PD 니나 로미나는 루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부유한 백인 피해자가 도심의 범죄자에게 위협받는 이야기야.”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입니다.
이 말은 미디어 생태계가 오랫동안 작동해온 방식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으며
공포는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으며 공포에도 시장이 있고 어떤 죽음은 시청률을 올리고, 어떤 죽음은 그러한 가치가 없다를 의미합니다. 루이스가 촬영한 영상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공포의 문법에 부합하기 때문이죠.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미지가 현실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급기야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단계를 시뮬라크르라고 불렀습니다.
루이스의 카메라는 현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방송국이 원하는 현실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현실이 텔레비전을 통해 수백만 가정으로 흘러들어갈 때, 시청자들은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루이스 블룸의 발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루이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미디어는 이 방식으로 작동해왔습니다. 루이스는 이 시스템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를 가장 순수하게 따른 것입니다.
그는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공급합니다.
그의 윤리적 결함은 오히려 그를 완벽한 공급자로 만들었으며 양심이 없다는 것은, 시장의 요구와 자신의 내면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괴물을 만든 것은 괴물인가, 아니면 괴물을 필요로 한 시장인가.”
2.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인간의 얼굴
루이스 블룸은 영화 내내 자기계발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의 대사를 옮겨 적으면 마치 동기부여 강연의 필기 노트처럼 보일정도죠.
“저는 열심히 일하고, 빠르게 배우고, 제 사업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문장들만 떼어놓으면, 마치 어느 스타트업 CEO의 인터뷰처럼 들립니다.
이처럼 루이스의 언어는 현대 사회가 성공한 인간에게 기대하는 언어와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언어 뒤에 윤리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이 현상을 설명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자본주의를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태입니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태.
피셔는 이것이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하죠.
이 맥락에서 루이스 블룸을 다시 보면, 그는 우리가 두려워 하는 일반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완성된 형태로 구현된 인간. 처음부터 자본주의 바깥은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효율, 성과, 목표, 성장. 이것이 그의 전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스템 안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경제 정책이 아니라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치하는 기술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인간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적 주체로 만들고 자기 자신을 인적 자본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투자하고, 성과를 측정하며,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것. 루이스 블룸은 바로 신자유주의 인간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루이스가 극단적이라면,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우리도 스스로를 브랜딩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투자하고, 타인을 경쟁자로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루이스와 우리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인가, 아니면 정도의 차이인가.
이 질문은 불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3. 카메라를 드는 순간,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진기자 케빈 카터는 한 장의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습니다. 굶주림으로 쓰러진 수단의 어린 소녀와, 그 뒤에서 마치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 전 세계가 그 사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다른 질문이 따라왔습니다. 사진기자 카터는 왜 소녀를 먼저 돕지 않았는가?
카터는 이 질문에 시달리다 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관찰자는 어디까지 관찰자일 수 있는가. 카메라를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저널리즘 윤리의 오래된 질문입니다. 그리고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이 질문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이죠.
루이스는 현장 그대로를 촬영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장을 조작하죠. 시체의 위치를 바꾸고, 사건의 순서를 재편집하고, 심지어 범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찰자라 주장하는 공모자입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돌아오면, 이야기는 루이스 한 명에서 훨씬 넓은 곳으로 펼쳐집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발견한 것은, 거대한 악이 괴물 같은 인간이 아니라 평범하고 성실히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에 의해 실행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악은 극적이지 않다. 악은 지루하고, 관료적이고, 반복적이다.
이것을 미디어 생태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니나는 루이스의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묻지도 않습니다. 방송국의 편집자는 그 영상이 시청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광고주는 그 뉴스 프로그램에 광고를 집행하며 내용을 묻지 않습니다. 시청자는 리모컨을 들고 그 채널을 볼뿐이죠. 각자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역할들이 모이면, 루이스 블룸의 범죄가 완성됩니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소비는 연대인가, 착취인가. 혹은 그것이 착취임을 알면서도 연대라고 믿고 싶은 우리의 자기기만인가.
루이스가 촬영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시청자가 소비할 때, 그 시청자는 공범인가? 그 이미지에 광고를 붙인 광고주는 공범인가. 그 프로그램을 편성한 방송국은 공범인가.
법적으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어떨까요?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나이트크롤러〉는 루이스 블룸이라는 괴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괴물을 가능하게 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루이스와 완전히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음은 클릭 경제가 어떻게 공포를 상품으로 전환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윤리가 어떻게 소멸했는지를 함꺼 살펴 보시죠.
2장 — 클릭 한 번의 무게
어텐션 이코노미, 공포의 유통, 그리고 게이트키퍼의 소멸
1. 우리의 시간이 팔리고 있다
경제학에는 희소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원은 유한하고, 그 유한함이 가치를 만들죠. 석유가 귀한 것은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금이 비싼 것은 채굴량이 적기 때문입니다.그런데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종류의 희소한 자원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주의력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플랫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콘텐츠의 양이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수준으로 팽창하면서, 가장 귀해진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그 콘텐츠를 소비할 눈과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텐션 이코노미, 즉 주의력 경제라고 부릅니다.
주의력이 자원이 되는 순간, 그것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됩니다. 플랫폼들은 사용자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설계하고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가장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콘텐츠를 학습하고, 그것을 더 많이 노출하려합니다. 그리고 알고리즘이 학습한 결과는 명확합니다.
인간은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충격받을 때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이죠.
공포는 주의력을 붙잡는 가장 효율적인 감정입니다.
공포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죠. 우리의 뇌는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위험 신호에 즉각 반응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가장 빠르게 알아채고 도망친 개체가 살아남았습니다. 공포는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존 본능이 이제 플랫폼의 수익 모델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극적인 뉴스를 클릭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안에 새겨진 본능이 21세기의 알고리즘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입니다.
〈나이트크롤러〉의 니나가 원하는 영상은 이 맥락에 부합니다. 그녀는 악인이 아니죠 그녀는 시장을 읽을 줄 아는 전문가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시청자의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이미지입니다. 피가 많을수록, 피해자가 우리와 비슷할수록, 가해자가 우리와 다를수록, 공포는 더 강렬해지고 시청률은 올라 갑니다. 루이스는 그 공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순수하게 실행하고 공급하죠.
문제는 이 공식이 뉴스 방송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등 소셜플랫폼을 지배하는 알고리즘은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분노와 공포를 자극하는 콘텐츠가 더 많은 반응을 얻고, 더 많은 반응을 얻은 콘텐츠가 더 많이 노출되죠. 루이스 블룸이 새벽의 LA를 질주하며 사고 현장을 찾아다니는 것과, 알고리즘이 가장 자극적인 콘텐츠를 끊임없이 피드 상단에 올려놓는 것은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둘 다 주의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포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게이트키퍼가 사라진 세계
한때 저널리즘에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편집장이 있었고, 데스크가 있었고, 팩트체커가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가 대중에게 전달될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이 완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편견이 있었고, 권력의 눈치를 봤고, 때로는 진실보다 이해관계를 우선시하죠. 그러나 적어도 그 과정에는 어떤 기준은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도하고 무엇을 보도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가시적인 책임의 소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은 그 문지기를 해체했습니다.
이제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고, 누구나 배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화의 측면이 있고. 권력이 외면 한 진실을 시민 저널리스트가 폭로하고,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개인 크리에이터가 전달하죠. 게이트키퍼의 해체는 다양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윤리의 공백도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편집 윤리가 없는 지금의 디지털 공간에서 콘텐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얼마나 많은 클릭을 받는가. 얼마나 많은 조회수를 올리는가.
그 기준 앞에서 정확성은 부차적이 되고, 맥락은 사치가 되고, 피해자의 존엄은 고려 대상에서 사라집니다. 루이스 블룸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활동하는 생태계에 그를 멈출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2017년,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아동을 대상으로 한 부적절한 콘텐츠를 수백만 어린이에게 추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알고리즘은 그 콘텐츠가 어린이에게 해롭다는 것을 판단하지 못했죠. 단지 조회수가 굉장했기 때문에 추천했을 뿐입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허위 정보를 담은 콘텐츠가 진실한 콘텐츠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도록 방치하기도 했습니다. 분노와 충격을 자극하는 가짜 뉴스가 팩트를 담은 기사보다 더 많은 공유를 얻었고, 알고리즘은 그것을 더 많이 노출하게 됩니다.
게이트키퍼가 사라진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섰고 알고리즘은 윤리를 모릅니다. 오직 참여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되었을 뿐…
영화로 돌아와 루이스 블룸은 이 생태계의 완벽한 적응자일 수 있습니다.
그는 윤리가 없고,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시장에서 일한다. 그의 성공은 그의 결함이 아니라 그의 결함을 보상하는 시스템의 보상이 아닐까요?
3.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불편한 사실을 직면해야겠죠.
앞서 언급한 사실들을 우리는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극적인 뉴스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공포를 연료로 작동한다는 것, 우리가 클릭할 때마다 그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고 플랫폼과 시스템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개인이 알고리즘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무한 스크롤, 자동 재생, 푸시 알림. 플랫폼의 모든 설계는 사용자가 머무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설계를 이기려면 끊임없는 의식적 저항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개인 하나의 저항이 큰의미로 발전하기까지 매우 힘든 시간을 가져야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우리는 공범인가, 피해자인가.
아마도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의 유지에 기여하는 공범이기 때문이죠. 이 두 가지 정체성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시스템을 더 강화합니다.
우리가 시스템을 유지하기에 루이스가 탄생하고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이스는 더 큰 팀과 함께 더 넓은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는 멈추지 않죠. 아니 멈출 이유가 없습니다. 시장은 여전히 그의 영상을 원하고, 방송국은 여전히 그것을 사고, 시청자는 여전히 그것을 보기 때문이죠.
그 순환이 계속되는 한, 루이스 블룸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아니면 더 많은 루이스 블룸이 태어나겠죠.
다음은 루이스 블룸이라는 인간 자체로 시선을 옮겨. 그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중요한 질문, 그는 정말 우리와 다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3장 — 루이스 블룸은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거울인가?
1.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었는가
영화는 루이스 블룸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 어떤 사건이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들었는지. 영화는 철저하게 침묵하죠. 우리는 그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미 완성된 루이스 블룸을 만나게 됩니다. 철조망을 훔치려다 경비원에게 들키고, 그 경비원을 제압하고, 태연하게 자리를 뜨는 인물. 첫 장면부터 그는 법과 질서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영화의 장치로 이 선택은 의도적입니다. 댄 길로이 감독은 루이스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그를 특수한 사례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만약 루이스가 학대받은 어린 시절을 가졌다면, 관객은 그를 불쌍히 여기거나 혹은 그의 행동을 트라우마로 설명하고 안도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명백한 정신 질환의 이력을 가졌다면, 관객은 그를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할 것입니다. 영화는 그 거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할 뿐이죠.
그리고 그 존재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낯익기 때문입니다.
2. DSM의 언어로 루이스를 읽는다면
정신의학의 진단 기준에서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고 합니다.
타인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침해하고 무시하는 패턴이 있으며
공감 능력의 결여 되고 거짓말과 조종을 통한 대인 관계.
충동적 행동. 무책임함.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나 죄책감의 부재.
영화속 루이스 블룸의 행동과 모습은 이 기준을 항목별로 충족합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동료를 조종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그리고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임상적 관점에서 그는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가진 인물로 읽히죠.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DSM의 진단 기준은 개인의 병리를 설명하면 루이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주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왜 루이스가 성공하는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루이스의 내면을 설명하지만, 루이스를 둘러싼 세계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죠.
사이코패스를 연구한 케빈 더튼은 그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이코패스적 특성, 즉 냉정함, 감정적 거리두기, 위험 감수, 빠른 판단력이 특정 직군에서 오히려 높은 성과와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CEO, 의사, 변호사, 특수부대원. 이 직군들은 공통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요구합니다. 더튼은 이것을 기능적 사이코패시라고 불렀습니다. 사이코패시는 맥락에 따라 병리가 되기도 하고, 경쟁 우위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루이스 블룸은 잘못된 세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특성이 완벽하게 보상받는 세계에 정확히 안착했을지도 모릅니다.
3. 자기계발의 언어가 숨기는 것
“위선적인 도덕 뒤에 숨은 우리보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괴물이 왜 더 유능해 보이는가”
루이스의 대사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영화 내내 자기계발서에서 직접 옮겨온 것 같은 언어를 구사합니다. 목표 설정, 지속적 학습, 열정, 성장 마인드셋. 이 언어들은 현대 사회가 성공한 인간에게 기대하고, 요청하고, 찬양하는 언어와 동일합니다.
이 점은 풍자가 아니라 루이스의 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지배적 담론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공허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그 열정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목표 달성이라는 개념은 그 목표가 타인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성장이라는 가치는 그 성장이 누구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지를 따지지 않죠.
영화속에서 루이스는 직원인 릭과의 대화 장면을 보면 직원과 고용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마치 경영학 강의를 하듯 조목조목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 논리는 아쉽게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많은 고용 관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고 차이가 있다면 루이스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이스 블룸이 불편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 대부분이 하는 것을 하되, 그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밀어내면서도 그것을 다른 언어로 포장합니다. 루이스는 그 포장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는 것을 정확히 ‘그것’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정직한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한 정직함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죠.
4. 우리는 루이스를 왜 끝까지 보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루이스가 나쁜 짓을 할 때, 우리는 그 행동이 나쁘다라고 자연스럽게 느끼죠.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가 성공하기를…
어쩌면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경찰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협상에서 니나를 이겼을 때, 경쟁자를 제거했을 때. 우리는 불편함과 동시에 어떤 쾌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점은 영화가 우리에게 정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사심리학자 마르 가르시아는 독자와 관객이 허구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도덕적 판단을 일시 정지한다는 사실을 발표합니다. 즉 우리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갈 때 현실의 윤리를 잠시 다른 곳에 두고 우리는 루이스가 되어본다는 것이죠. 그의 냉정함을, 그의 집중력을, 그의 두려움 이겨내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불쾌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루이스가 있습니다. 규칙을 무시하고 싶은 충동, 타인의 시선 없이 원하는 것을 향해 직진하고 싶은 욕망, 감정의 무게 없이 냉정하게 판단하고 싶은 순간들. 우리는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억누르지 않죠.
영화는 그 억눌린 것을 스크린 위에 풀어놓고, 우리가 그것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지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것이 순수한 혐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5. 거울 앞에서
결국 루이스 블룸은 두 가지 동시에 존재한다.
그는 임상적으로 분류 가능한 반사회적 인격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의 극단적 완성이죠. 그는 병리적 개인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이 불러내 주체입니다. 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의 형상입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것이 중요한데
루이스를 병리학적으로만 보면, 우리는 그를 우리와 무관한 예외적 존재로 분류하고 안도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를 순수한 시스템의 산물로만 보면, 우리는 그에게서 개인의 책임을 지우고 모든 것을 구조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루이스는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세계가 있으며 개인의 선택과 구조적 조건은 서로를 지우고 그것들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거울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여준다. 〈나이트크롤러〉는 그런 거울입니다. 루이스 블룸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시스템의 윤곽을, 우리 자신의 욕망의 흔적을, 그리고 우리가 공모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울을 깨는 것은 쉽지 않죠. 외면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들여다보는 것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시작이죠.
다음으로는 루이스를 둘러싼 구조에 대해 시선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루이스 한 명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공범의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지를 살펴볼 겁니다. 니나, 릭, 시청자, 그리고 우리.
4장 — 공범의 지도
니나, 릭, 시청자, 그리고 우리
1. 공범이라는 단어의 무게
공범이라는 단어는 불편합니다.
법정에서 쓰이는 언어로 범죄에 가담한 자, 악의를 가진 자, 처벌받아야 하는 자, 우리는 그 단어를 들을 때 자신과의 거리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단어입니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았다. 나는 공범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지켜보며 발견한 것은, 공범의 경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흐릿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규칙을 따르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관료였다. 그는 유대인을 증오했기 때문에 학살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했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고. 거대한 악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선택들이 모여 완성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이트크롤러〉의 세계에는 루이스 블룸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변에 니나가 있고, 릭이 있고, 경찰이 있고, 광고주가 있고, 시청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모이면, 루이스의 행위가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공범의 지도입니다.
2. 니나 — 알면서 묻지 않는 자
니나 로미나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지역 방송국에서 일했고, 시청률 압박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루이스의 영상을 구매하는 것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직업적 판단였습니다. 그 영상이 시청률을 올리고, 시청률은 그녀의 기준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니나는 루이스에게 자신이 원하는 영상의 종류를 말합니다. 어떤 피해자가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지를, 어떤 범죄가 광고 수익을 높이는지를. 그녀는 이것을 말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그녀가 악인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녀가 방속국이라는 논리 안에서 너무 오래 살았고 그것이 논리가 아니라 현실 자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보면, 니나는 그 상태의 전형입니다. 그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시청률이 전부인 세계, 공포가 상품인 세계. 그녀에겐 그거싱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 안에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죠.
그런데 니나가 공범인 것은 그녀가 나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공범인 것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스의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해자의 동의는 있었는지. 그녀는 묻지 않습니다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알면 불편해지기 때문에. 알면 결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이 모르는 척함이 공범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이것을 하는가. 우리가 입는 옷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우리가 사용하는 플랫폼이 어떤 방식으로 수익을 내는지. 우리는 알 수 있지만, 묻지 않습니다. 니나처럼.
3. 릭 — 시스템 안의 가장 약한 고리
릭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루이스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릭은 자신의 처우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항의하지만, 루이스의 논리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고. 그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망칠 수 없었죠.
릭은 긱 이코노미의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형상입니다. 공식적인 고용 계약이 없고, 노동 권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습니다. 그에게 루이스의 제안은 착취이지만, 동시에 그가 가진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착취와 기회가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릭의 비극은 그가 나쁜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최선을 선택했습니다. 비극은 그 선택지 자체가 이미 잘못 설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속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계약직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적 현실과 릭의 처지는 구조적으로 유사하죠. 법적 보호 없이, 협상력 없이, 시스템 안의 가장 약한 고리로 존재라는 사람들. 그들은 착취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현재 자신에게 가능한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에 계속하게 됩니다.
릭이 공범인가. 이 질문에 쉽게 예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공범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하겠죠. 선택지가 없는 곳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가난한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4. 시청자 — 소비는 중립적인가
루이스가 촬영한 피해자의 이미지가 방송되면 그것을 보는 시청자들이 있겠죠
그 얼굴들은 평범할 것입니다. 소파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는 사람들. 그들은 루이스를 모릅니다.
니나의 선택도 모른다. 그저 텔레비전을 켰을 뿐입니다.
시청자. 그들은 공범인가.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과 재난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의 윤리를 탐구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고통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 연대인가, 착취인가. 그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고통에 더 민감해지는가, 아니면 오히려 둔감해지는가.
그녀의 답은 불확실합니다. 이미지의 소비는 때로 행동을 촉발하고, 때로 무감각을 만듭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맥락과 의도에 따라 달라지죠.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소비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그 봄은 그 무언가를 가능하게 한 시스템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클릭은 신호이묘 조회수는 승인이다.
우리가 자극적인 뉴스를 클릭할 때, 우리는 그 뉴스를 만든 방식이 옳다고 시스템에게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알고리즘은 그 신호를 학습하고, 더 많은 같은 종류의 콘텐츠를 노출하겠죠. 우리의 클릭 하나가 루이스 블룸의 다음 촬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입니다. 개인이 소비를 거부하는 것만으로 시스템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클릭하지 않아도, 나머지 수백만 명이 클릭하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소비 선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종종 시스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재활용을 열심히 하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다처럼 커대한 플랫폼이 해결해야할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비의 윤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죠. 개인으로서 더 의식적인 소비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둘 다 꼭 필요한 부분이죠.
5. 공범의 지도를 완성하며
니나는 묻지 않았습니다. 릭은 선택할 수 없었고. 시청자는 몰랐습니다. 광고주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알고리즘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공범의 지도는 루이스 한 명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의 생태계를 갖춥니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각자가 자신은 괜찮다고 믿는 생태계. 그 생태계 안에서 루이스의 행위가 가능해집니다.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렌트의 말로 돌아오면, 악은 극적이지 않다. 악은 시스템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선택들이 모여 완성된다. 루이스 블룸은 그 완성의 가까운 얼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공범 지도 위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니나의 자리인가, 릭의 자리인가, 시청자의 자리인가. 어쩌면 우리는 동시에 여러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묻지 않는 니나이고, 어떤 순간에는 선택지가 없는 릭이고, 어떤 순간에는 소파에 앉아 화면을 보는 시청자 입장이겠죠.
공범의 지도는 우리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 지도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이 바로 시작점일 수 있습니다. 외면은 지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들여다보는 것만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다.
마지막 질문을 담은 다음 영상으로 영화 <영화 나이트크롤러>의 감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이 모든 것을 알고 난 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알고리즘 시대에 윤리적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5장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알고리즘 시대의 윤리적 주체
1. 답을 원하는 마음에 대하여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아마 이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겠고,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공범이라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스마트폰을 버려야 하는가. 뉴스를 끊어야 하는가. 플랫폼을 탈출해야 하는가.
이 마음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면 해결책을 원한다. 진단 다음에는 처방이 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장은 그 기대를 일부 배신할 것이다.
깔끔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키우세요. 알고리즘을 의식하세요. 자극적인 콘텐츠를 클릭하지 마세요. 이 조언들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 책이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를 스스로 배신하는 것이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의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은 해결책 대신 질문을 완성하려 한다. 왜냐하면 때로는 질문을 정확하게 갖는 것이 틀린 답을 갖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이다.
2. 개인의 실천은 의미가 없는가
그렇다고 개인의 실천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식적인 콘텐츠 소비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클릭하고, 무엇을 공유하고, 무엇에 시간을 쓰는지는 작은 단위에서 실제로 의미를 갖습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행동을 학습하고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면, 알고리즘은 다른 것을 학습합니다. 이것은 미미하지만 실재하는 영향력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의식 자체입니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우리가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범위가 물리적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눈앞에서 아이가 물에 빠지면 우리는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죠.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수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저녁을 먹습니다. 거리가 도덕적 감수성을 마비시키는 현상입니다.
알고리즘 시대의 미디어 소비도 마찬가지겠죠. 우리가 클릭하는 것과 그 클릭이 만들어내는 결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거리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의식적인 소비란 그 거리를 인위적으로 좁히는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어떤 사슬의 일부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
이것이 알고리즘과 시스템을 즉각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인간. 편리함보다 정직함을 선택하려는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모이는 것이 구조적 변화의 전제 조건일 것입니다.
3. 구조는 어떻게 바뀌는가
역사를 보면, 구조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바뀌어왔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압력입니다. 법과 규제.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충분히 가시화되면, 사회는 그것을 규제하려 합니다. 유럽연합의 디지털 서비스법은 그런 방향의 시도입니다. 플랫폼이 자신의 알고리즘이 사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것. 완벽하지 않고, 느리고, 때로는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책임을 나눠 갖는 의식을 심어 주는 시작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부의 변화입니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 니나 같은 편집자가 다른 기준을 갖게 되는 것. 광고주가 자신의 광고가 어떤 콘텐츠 옆에 붙는지를 신경 쓰게 되는 것. 플랫폼 엔지니어가 알고리즘을 설계할 때 참여하여 성과의 극대화 외의 다른 가치를 고려하게 되는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죠.
이 두 가지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외부의 압력 없이 내부의 변화만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착각이며 내부의 변화 없이 외부의 규제만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규제는 항상 기술보다 느리고, 권력은 항상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죠.
결국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가 바뀌어야 합니다. 공포보다 진실을, 자극보다 깊이를, 클릭보다 이해를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문화. 물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다 믿습니다.
4. 루이스 블룸이 없는 세계는 가능한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루이스 블룸이 없는 세계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항상 타인의 고통을 상품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술이 바뀌고, 플랫폼이 바뀌고, 형식이 바뀌어도, 그 본질은 반복되겠죠.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의 죽음을 관람하던 군중과, 오늘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자극적인 영상을 소비하는 우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이야기는 허무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현재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즐기는 것은 더 이상 합법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용납되고 무엇이 용납되지 않는지에 대한 기준이 변했죠. 천천히, 고통스럽게, 불완전하게. 그러나 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의 방향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것입니다.
루이스 블룸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닌 루이스 블룸이 성공하는 세계에서, 루이스 블룸이 조금 덜 성공하는 세계로. 그 작은 이동을 목표로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동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내가 클릭하지 않은 것. 오늘 내가 물어본 것. 오늘 내가 외면하지 않은 것으로 부터 말이죠
5. 영화가 끝난 후
〈나이트크롤러〉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이스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큰 팀을 이끌고,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갑니다. 그의 사업은 성장했고. 카메라는 그를 영웅으로 그리지도, 악당으로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로스엔젤레스가 이렇게 작동한다고.
많은 관객이 이 결말에 불만을 느낄 수 있겠죠. 루이스가 처벌받지 않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영화가 너무 냉소적이라고. 그러나 저는 이 결말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도 루이스 블룸들은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성공하죠. 그것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영화는 그 진실을 직면하게 만들고. 우리가 원하는 결말, 즉 악인이 처벌받고 세계가 정의로워지는 결말을 주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스크린이 꺼진 후에도 이 질문은 남습니다. 이것이 좋은 영화의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이트크롤러〉를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우리 시대의 가장 정직한 거울 중 하나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루이스 블룸은 픽션입니다. 그러나 그를 가능하게 한 세계는 픽션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우리 각자가 매일 내리는 선택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죠
“알고리즘 시대에 우리는 윤리적 주체로 지속할 수 있을까요?” 로 생각으로 시작된 이 영상의 끝은 이런 문구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상학이었습니다.
“1993년 처음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사진 제목이 The Vulture and the Little Girl로 소개되었으나 2011년에 실제 사진의 소녀는 Kong Nyong이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밝혀짐.